사람들은 꿈을 꾼다. 당치도 않은 꿈을 꾼다. 가끔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침대를 천장에 매다는 사람의 이야기.

하얀 벽이 둘러싼 병원 독방에서 그는 먼저 침대보를 벗겨내어 가늘게 찢은 다음 새끼줄을 꼬았다. 침대보로 땋아 내린 새끼줄을 충분한 길이를 두고 침대 다리에 동여 맸다. 그는 침대를 옆으로 세워 올라 섰다. 천장은 양 손에 성큼 닿았다. 그는 석고보드로 된 천장재를 하나하나 뜯어냈다. 침대에서 뽑아낸 부품 한 조각을 드라이버 삼아 들고. 하얗게 묻어나는 석고질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통증을 일으킬 무렵 천장은 회색 콘크리트를 들어냈다. 앙상한 스테인레스 스틸 프레임을 지지하고 있는 녹슨 철심을 바라보고 침대를 매달 자리를 살펴볼 무렵 덩치 좋은 남자 간호사들이 방으로 들이 닥쳤다. 중력을 이겨보기 위해 침대를 천장에 매달겠다던 그는 건장한 간호사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포박 당하고 말았다. 바닥에 납작히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흘러 내린다. '불쌍한 너희 정상인들은 서정시가 뭔지 몰라!'
우리는 자유로운 새를 바라보며 하늘을 날고 싶었던 18세기 이전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 할 수 있을까? 무거운 몸을 땅바닥에서 조금이라도 띄우기 위해 설계된 Davinci의 비행기 설계를 우리는 과학의 눈으로만 보고 있는 것일까? 17세기 이후 Bourgeois적 사고가 세계를 지배할 무렵, 그들의 무기였던 과학과 합리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사고는 신흥 Bourgeoisie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학이념, 합리적 사고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안주한다. 과학과 합리성이 특정 계급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라거나, 획일된 사고를 폭력적으로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 할 생각은 없다. 단지, 어느 특별한 오후에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낭만적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한다. 우연히 코 앞에 떨어진 서정시에 웃음으로 답할 수 없는 딱딱한 머리에 가련함을 느낀다. 이것들을 비정상의 범주 안에 분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걱정한다. 비정상의 범주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상성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똑같이 중력을 이기기 위해 무모한 짓을 저질렀지만,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와 병원에서 포박당한 남자 사이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명확한 구분선을 그을 수 없다.
단지 불확실성이 넘실대는 낭만과 현실 사이로 시대의 담론이 녹아 들어 갈 뿐이다.

아주 종종 아주 당연한 것들에 "왜?" 라는 질문을 해본다. "왜 땅에 붙어있어야 하지?", "똑 같은 생각을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금치산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발명가가 되지?" 라이트 형제는 낭만을 현실에 이루었고, 병원의 그 남자는 시도만 했나? 아니다. 모두 다 "사람은 땅에 붙어산다" 라는 아주 당연한 명제에 "왜?" 라는 질문을 던졌고, 모두 다 망상에 충실했을 뿐이다. 라이트 형제의 날 수 있는 구조물은 시대에 유용했고, "그"의 서정시는 간호사들을 웃기지 못했을 뿐이다.

인간은 "땅에 붙어 산다"라는 당연한 명제 (These)에 "왜?"라는 반명제 (Antithese)를 던지며 비행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낭만은 현실이 되었고, 서정시는 포박 당했다. 안티테제를 말하며 헤겔을 들먹이고 싶지 않다. 단어의 출처가 어디가 됐건 생각, 이해, 실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종종 포박당하고 가끔 혁신 할지언정 디자인을 아주 당연한 These안에 가둬놓고 싶지 않다. 포박당할 서정시라도 햇빛 아래 키워보고 싶다.